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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짧은 생각

이유없는 불안은 없다.

by 그레이 후드 2024.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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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가 있는 모습 그대로 살아가기를 바라며

 

  아주 오래 전 알고 지냈던 지인에게 연락이 왔다. 상담심리 대학원에 재학중인 후배가 있는데 실습을 위해 내담자를 구한다고 했다. 그런데 문득 연락도 하지 않고 지내던 내 생각이 났더라는 것이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굳이 찾아서 심리검사를 할 생각은 없겠다는 생각에 흔쾌히 시간을 내었다.

 

  심리검사는 몇 개월에 걸쳐 진행되었다. 자발적으로 심리검사를 신청한 것이 아니어서 평소에 어떤 심리적인 문제가 있는지 묻는 대답에 잠시 멈칫했다. 나에게는 알면서도 모른척 넘어가는 문제가 있었다. 불안이었다. 아주 오랜 기간동안 가지고 있던 문제였는데, 늘상 100을 기준으로 10 정도의 불안감을 가지고 있음을 말했다. 상담은 이 증상을 기준으로 시작되었다. 검사 항목은 그림 검사, 문장완성검사, 온라인 검사, 지능 검사 4가지였다.

 

  결과는 인상적이었다.

인지적 기능은 우수하나 처리 속도를 나타내는 지표는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임.
인지기능이 불균등하고 비효율적으로 발휘되는 상태임.
완벽주의적 성향, 강한 자기통제 경향이 있음.

 

  GAI 지표가 최상위권으로 나왔다. 내 생각과 달리 나는 바보가 아니었다. 나는 망설임이 많고 자기통제가 심한 사람이었고, 극심한 자기통제 때문에 인지적인 처리 속도 마저도 몇 번이고 되새김질하며 완벽을 기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무슨 일이든 제대로 시작하고 제대로 끝마치는 것에 집착하는 성향이 있었다. 그리하여 불안의 원인을 알게 되었고, 많은 것들을 내려놓고자 하였다.

 

  나에게 있는 문제는 나만 고치면 되는 것이지만, 이 무렵 나를 둘러싼 환경도 불안을 야기했다. 회사에서 팀원들의 퇴사가 속출했고, 상반기에 팀장이 세 차례나 바뀌었다. 내 일은 외부와 관련된 일이라 팀내에서 간섭할 일은 없었지만, 새로운 팀장은 팀원들을 괴롭히면서 이전 직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불러 모으려 했다.

 

  불안은 극도로 심해졌고, 사무실에 앉아있으면 공중에 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정신과를 가고싶었지만 근처 정신과는 초진을 보기까지 최소 3개월을 기다려야 했다. 결국 대학 상담 센터에서 상담을 시작했다. 상담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다소 기가 빨리는 느낌이 있었다. 얼마 후 TCI 검사 결과를 받고서야 불안의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하기 싫어하는 인간인데 세상에 나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사람으로, 본성에 따르는 일들을 소홀히 하고 있었다.

 

  본성을 거슬러 수동적으로 하게 된 일들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이제는 나의 삶을 찾아야만 했다. 나를 위해 아무도 나를 자극하지 않는 환경에서 홀로 가만히 있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원하지 않는 일을 열심히 하는 내 자신이 싫어서 프로젝트가 끝나자마자 회사를 그만 두었다.

 

  아주 오랜 기간 불안했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렇게 알게된 '나'의 모습들을 돌아보니, '너 마음대로 해도 돼'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들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퇴직금이 나오자마자 해외 여행을 계획했다. 이후 나는 어떻게 변화했는지 다음 글에서 이야기해보려 한다.

 

  이유없는 불안은 없다. 나와 내가 잘 지내고 있는지 확인하는 시기도 필요하다. 무언가 말로 표현하지 못할 아픔이 느껴진다면, 자연에 거스르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중 한 구절이 떠오른다.

 

 

우리의 이성과 맞지않아 이질적이어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괴롭히는 온갖 인상을
제거하고 지워내서 즉시 완전한 평정심을 되찾는 것은
얼마나 유쾌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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