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블로그/짧은 생각

짧은 생각을 긴 글로 표현하는 연습

by 그레이 후드 2022. 12. 13.
728x90

 중학교 때 오래된 고전 만화 '광수 생각'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아주 어릴 적 엄마와 함께 한의원에서 보았던, 바로 그 만화를 다시 만나니 반가운 마음에 한 권을 빠르게 읽었습니다. 이후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광수생각을 찾아 읽었습니다. 사춘기 시절에 넓고 깊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도와준 짧은 만화들이 지금에 와서야 고맙게 느껴집니다. 유독 책과 철학에 관심이 많았던 반 친구들 덕분에 광수생각을 넘어서 철학사전, 탈무드 같은 책을 접하면서 크게 방황하지 않는 사춘기 시절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그림 출처 : 나무위키 / 광수생각

 그러나 '철학'을 삶의 중심으로 끌고 온 적은 없는 듯 합니다. 특히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대학에 가기 위해 애쓰던 순간이나, 먹고 살기 위한 직업을 고민하던 순간에는 철학을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어른이 되어서는 철학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감추고 살았습니다. 컴퓨터 전공자의 일상과 비교해 철학을 좋아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문과스럽고, 지나치게 고전적이면서, 또 지나치게 개성있어 보입니다. 그렇지만 한 사람이 지닌 작고 소중한 본심은 자신이 사랑해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에게서도 관심을 받을 수 없지요. 그래서 철학을 좋아한다고 고백하기로 했습니다.

 

 실제로 철학은 생각과 달리 지나치게 문과스럽거나 고전적이지도 않고, 오히려 평범한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합니다. 마르쿠스, 세네카, 소크라테스, 볼테르와 같은 사람들이 옛날 사람들이라 지금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오해입니다. 많은 고전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고전을 읽을 때마다, 어쩌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10대의 마음은 지난 모든 시대의 10대들의 마음과 같고 20대, 30대, 40대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코스모스(칼 세이건 저)의 첫 장을 시작하는 세네카의 글은 무엇보다도 압도적인 충격이었습니다.

"인간이 여러 세대에 걸쳐 부지런히 연구를 계속한다면, 지금은 짙은 암흑 속에 감춰져 있는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거기에 빛이 비쳐 그 안에 숨어 있는 진리의 실상이 밖으로 드러나게 될 때가 오고야 말 것이다. 

그것은 한 사람의 생애로는 부족하다. 누가 자신의 일생을 하늘을 연구하는 데만 온통 바친다고 하더라도, 우주와 같은 엄청난 주제를 다루기에 한 사람의 일생은 너무 짧고 부족하다. ...

진리는 세대를 거듭하면서 하나씩 그리고 조금씩 서서히 밝혀지게 마련이다. 우리 먼 후손들은, 자신들에게는 아주 뻔한 것들조차 우리가 모르고 있었음을 의아해 할 것이다. ... 

수없이 많은 발견이 먼 미래에도 끝없이 이어질 것이며, 그 과정에서 결국 우리에 대한 기억은 모두 사라지고 말 것이다. 우리 후손들이 끊임없이 연구해서 밝혀야 할 그 무엇을 우주가 무궁무진으로 품고 있지 않다면, 그리고 우리 우주가 혹시라도 그러한 우주라면, 우리는 그것을 한낱 보잘것없고 초라한 존재로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자연의 신비는 단 한 번에 한꺼번에 밝혀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 세네카, <자연학의 문제> 제7권, 1세기

 

 로마의 황제가 죽음을 원소의 분해라고 표현한 것은, 그리고 그것이 자연의 이치이니 인간이 두려워할 것은 아니라는 말은 혼란한 시기에 위로가 되기도 했습니다.

... 무엇보다도 죽음은 모든 살아 있는 피조물들을 구성하고 잇는 원소들이 해체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서 기쁜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게 해준다. 원소들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 원소들 자체에게 두려운 일이 아닌데, 우리가 원소들의 변화와 해체를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것은 자연과 본성에 따라 일어나는 일이고, 자연에 따라 일어나는 것은 나쁜 일일 수 없기 때문이다.

- 마르쿠스, <명상록> 제2권 17, 170년대

 

 철학자들이 어떻게 그렇게 깊고도 넓은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신기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에게는 순간 순간 지나가는 생각들이 있고, 그것을 붙잡아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확장시키고 파헤친다면 모두가 가진 철학을 세상에 선보일 수 있게 될 것 같습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일상을 살며 일터에서, 가정에서, 거리에서 느낀 순간들을 긴 글로 적어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저도 그러한 글들을 부끄러움 없이 기록해보고 싶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겠지요. 지금 이 글이 '나 철학 좋아해'라는 메시지를 길게 풀어서 쓴 것처럼요.

728x90

댓글